그러니까 출근하면서 집에 아이폰을 두고 나왔다는 얘기. 지하철역 근처에서 생각났지만 왕복하고 챙기는 데 15분을 버리면 지각 확정이라 과감히 (눈물을 흘리며) 포기했다.
짧은 시간동안 두뇌 클럭 수가 높아졌다. 전화는 회사 가서 착신전환을 하고, SMS는 포기지만 맥북에서 아이메시지를 쓰고, 카톡 PC 버전 쓰면 왠만한 연락은 가능하겠지. 폰으로 하던 나머지 일들은 대부분 맥북과 PC로 하면 되고…
심심해
이런 생각은 지하철을 타자마자 무너졌다. 보통 출근길에는 슬로우뉴스 편집팀원들과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아침에 올릴 글에 대해 얘기한다. 글을 일찍 올리게 되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로 소개하고 초기 반응을 살피다 보면 내릴 시간이 된다. 하지만 오늘은 환승역까지 15분 정도의 시간 동안 열차 출입문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잘 생기긴 했네”라는 생각을 하는 것 외에는.
무가지라도 챙길걸 싶었지만, 내가 역에 도착하는 시간엔 대부분의 무가지들은 이미 다 팔리고(?) 없다. 요즘은 열차 선반 위에 놓인 무가지도 거의 없었다. 결국 환승역 통로에 있는 매점에서 “시사IN” 322호를 샀다. 느낌상 거의 백만 년만에 시사 주간지를 산 것 같다.
폰이 없으면 ‘심심하다’는 느낌은 일할 때 외에는 계속 들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길 때도 스마트폰이 없으니 영 어색하다. 덕분에 아침에 산 시사IN이 계속 동반자가 되었다.
인증샷… 어?
시사IN을 보는데 낯익은 트위터 아이디가 등장했다. 오, 이거 찍어서 멘션 보내야지. 어라, 폰이 없잖아… 폰이 없으면 사진을 못 찍는구나. 결국 직장 동료 폰으로 찍어서 메일로 받은 다음 보냈다.
어쨌든 회사에 일할 때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왠만한 건 PC로 다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난 회사에서는 일에만 집중하는 타입이다. (사장님, 보고 계십니까. 안 믿으신다구요…) 게다가 착신전환 했는데 전화도 안 와. 으헝헝헝헝허어어어.
할인도 못 받고
점심시간이 되었고 오늘 점심은 귀차니즘을 해결하는 편의점 도시락으로 정했다. 편의점에 왔으면 당연히 올레 별 할인과 GS&포인트 적립을… 할 수가 없다. 내 지갑에 있던 대부분의 카드는 지금 아이폰 안에 있다. 결국 눈물을 삼키며 제 값 주고 사서 먹었다.
스마트폰이 없었던 12시간
사실 이 12시간동안, 스마트폰으로만 할 수 있는데 못했던 일은 사진 찍기와 전자 지갑 사용 뿐이었다. 직업상 회사에서는 종일 PC를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맥북도 없이 외근을 했다거나 했으면 지옥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뭐 스마트폰이 없으니 오가며 풍경을 볼 수 있어요라던가, 책도 읽고 더 알찬 시간을 보냈어요 따위의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나는 특정한 무엇인가가 다른 무엇보다 우월하거나 가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한다거나 카톡방에서 수다를 떠는 건 나쁜 게 아니다.
다만 평소와는 ‘다른’ 시간을 보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신선했다. 이번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지만, 단조로운 생활에 살짝 변화를 주는 정도는 앞으로도 해볼만하겠다는 정도, 딱 이 정도 생각을 했다. 그리고는? 뭐 집에 오자마자 스마트폰 찾아서 알림 온 거 들여다봤지. 데헷.
덧. 요즘은 회의 때와 가족과 식사할 때는 폰을 꺼내지 않는다. 회의할 때는 자리에 폰을 두고 들어가고, 가족과 식사할 때는 폰을 침대 위에 던져둔다. 아주 조금은 달라지는 게 있다.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