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의료 만화는 인기가 있을까
만화에는 여러 가지 직업들이 나오지만, 의사, 변호사(법조인), 요리사가 나오는 만화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직업상 개발자나 엔지니어가 나오는 만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 하지만 대중적인 공감을 얻기는 쉽지 않아서인지 많지가 않다. (“기가 도쿄 토이박스” 등) 예를 들어 개발자나 엔지니어가 나와서 “부장님! 서버 리소스 사용률이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70%, 80%, 90%, 아, 안 돼…”, “이 코드에서는 푸른 바다에서 헤엄치는 자유로운 열대어가 느껴지는군. 오늘의 승리는 너다!”, “전설적인 개발자였던 할아버지의 이름을 걸고! 이 버그의 범인은 바로…” 이러면 이상하잖아. (…)
아무튼 앞서 말한 의사 등의 직업들이 더 많이 다뤄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와 삶 자체에 가까이 접근하는 직업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직업 그 자체로 사람들의 공감을 끈다기보다는 그 직업이 다루는 일과 이에 맞닿은 사람의 삶이 감정을 이입하게 하는 것이다.
그중 의료 분야는 삶과 죽음에 직접 관여하고 있으니만큼 이 소재라면 어떤 작품을 집어들어도 어느 정도의 재미는 보장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좀 아쉽지만 일본에서는) 작품이 많은 만큼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는 여지도 많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오며 아직도 계속 나오고 있는 의료 무협 판타지(…) “닥터 K” 시리즈, 개그가 풍부한 “최상의 명의”, 일본 의료계의 내부 정치 문제를 다루며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의룡”이라던가, 오지 진료소 의사의 이야기 “Dr. 코토 진료소”, 천재 의사의 성장기 “갓핸드 테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로 시간 이동을 한 의사 “타임 슬립 닥터 진” 등이 추천할만하다.
헬로우 블랙잭
또 하나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지금부터 얘기하려는 “헬로우 블랙잭”이다. 해양 구조대원의 이야기를 그린 “해원”으로 명성을 얻었던 샤토 슈호의 작품으로, 한국판은 서울문화사에서 2003년부터 2006년까지 13권을 발행했다. 이 작품에 관해 (아마도) 알아두면 좋을 5가지를 소개해 본다.
1. 블랙잭이란
“헬로우 블랙잭”에 나오는 ‘블랙잭’은 카드 게임 이름이 아니라,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 등을 만든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명이자 등장인물인 “블랙잭”을 뜻한다. 블랙잭이라는 가명을 쓰는 무면허 천재 외과 의사의 이야기를 다룬 “블랙잭”은 1973년부터 1983년까지 연재된 작품으로, 이 분야에서는 전설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그 블랙잭에게 안부를 전하는 “헬로우 블랙잭”은 고전 명작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기도 하지만, 평범한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역설적이기도 하다.
2. 평범한 인턴의 이야기
주인공인 사이토 에이지로는 의대를 졸업한 대학병원 인턴이다. “난 더러운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아”라는 이상을 가슴에 품고 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인턴은 쥐꼬리만 한 월급에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존재이고, 병원 야간 응급실은 돈이 되는 교통사고 환자가 아니면 받지 않으려 하는 등, 산 넘어 산이다.
의료 만화라 하면 자고로 천재 의사가 나와서 역경을 헤치고 성공하고 막 이래야 하는데, 주인공은 평범한데다가 정식 의사도 아닌 인턴이다. 그런 주인공에게 의학적 이상과 열혈성을 심어주고 나니 매 일화는 좌절의 연속이다.
3. 주인공이 경험한 5개의 의과
우리나라도 비슷하겠지만, 일본의 인턴도 여러 과를 돌면서 근무하게 된다. “헬로우 블랙잭”의 사이토는 13권까지를 기준으로 5개의 과를 경험한다.
- 제1외과 (심장외과): 1화(1권) ~ 16화(2권)
- 순환기내과: 17화(3권) ~ 20화(3권)
- NICU(신생아집중치료실)/소아과: 21화(3권) ~ 41화(5권)
- 제4외과(암 병동): 42화(5권) ~ 79화(8권)
- 정신과: 80화(9권) ~ 127화(13권)
이 중 백미는 분량상으로도 가장 많은 암 병동과 정신과 이야기다. 암 병동의 시작은 “충격적인 정보가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읽어 보시고 잘 판단해 주시길 바랍니다.”라는 작가의 말로 시작할 정도이다.
4. 이케다 초등학교 학살 사건
이 작품은 의료만화 중 리얼리티 면에서 최고라 불린다. 의료 전문가가 아니라서 세부적인 부분까지 정확하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많은 평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게다가 현실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마무리되기 때문에 독자들의 속을 답답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을 정도다.
작품 전체는 충실한 취재와 체험을 잘 반영하고 있는데 특히 정신과 편이 그러하다. 실제 2001년 6월 일본 오사카에서 일어났던 이케다 초등학교 학살 사건이 언급된다. 이는 조현증(구 ‘정신분열증’) 병력이 있는 범인이 환각 상태에서 학교에 흉기를 들고 난입해 학생 8명이 사망하고 교사 3명 포함 15명이 중경상을 입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작품에 담으면서, 의료계의 현실뿐 아니라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선정적으로 접근하는 언론의 문제까지를 잘 짚어내고 있다.
그 외에 국내에서는 경기도 정신보건센터가 자원봉사 교육을 위한 센터 비치용으로 추천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내용이 너무 암울해서 어땠을지는…)
5. 신 헬로우 블랙잭
일본에서는 작가와 출판사(코단샤)와의 갈등 끝에 다른 출판사(쇼가쿠칸)로 옮긴 후, “신 헬로우 블랙잭”으로 9권 완결되었다. 이 문제가 국내 출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국내에서는 서울문화사가 “헬로우 블랙잭” 13권까지를 발행한 후, “신 헬로우 블랙잭”은 나오지 않고 있다.
하지만 13권까지의 내용으로도 충분히 완결성이 있는 내용이어서 작품을 보는 데는 큰 문제는 없다. 현재 서울문화사 발행분은 현재 절판 상태여서 살 방법이 없지만, 최근 카카오 페이지에 등록되어 전 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스마트폰에 카카오페이지를 설치했다면 아래 링크를 클릭하고 ‘바로보기’를 누르면 된다.
번외: “변호인”과 “헬로우 블랙잭” 4가지 비교 포인트
시류에 영합하기 위해(…) 영화 “변호인”와 비교를 해본다.
1. 의사와 변호사
대중문화에서 가장 핫한 직업군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즉, 만나게 되는 순간 한 사람의 삶의 큰 영향을 주는 직업이다.
2. 송우석과 사토우
송우석 변호사는 극 중에서 잘나가는 세무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변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사토우는 기본적으로 의학적 이상에 가득한 인턴이고, 여러 좌절 속에서도 그 이상을 가능한 유지하기 위해 애쓴다.
3. 좌절과 실패
송우석 변호사는 결국 ‘부동림 사건’에서 무죄 평결을 받아내는 데 실패한다. 하지만 이 사건의 그의 인생을 바꾸었고, 영화의 결말 너머 모두가 아는 현실세계의 변화(미완일지라도)로 이어진다. 사토우는 그저 인턴일 뿐이고 천재적인 의술도 권한도 없다. 매 에피소드에서는 그는 좌절하고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신 헬로우 블랙잭”에서는 어땠을지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4. 희망
송우석과 사토우는 모두 좌절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둘 다 우여곡절과 함께 마음속에 무언가를 안고 일단 걷는다.
* 이 글은 “헬로우 블랙잭” 카카오 페이지 공급사와의 친분으로(^^) 쓴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