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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양력설 잘 쇠고 있습니다.

대통령 당선자에게 바란다: 양력설과 음력설, 어느 쪽입니까?

새해를 맞이하여 개인적인 슬픈 역사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본가에서는 양력설을 쇤다. 양력 1월 1일에 차례를 지낸다는 얘기다. 이게 왜 슬픈 얘기냐 하면 나는 평생 정동진 같은 곳에 새해 해돋이를 보러 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새해가 되면 정동진을 간다, 포항을 간다 하면서 해돋이 계획을 희망차게 세우고 있을 때 나는 “우리 집은 양력 설 쇠서…”라고 하며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차례 따위…’라고 생각하며 엇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일단 호적은 유지하고 싶어서 그러지도 못했고. (주: 물론 호주제를 규정한 호적법은 2005년 위헌-헌법불합치-판결을 받고, 2008년 가족관계등록법으로 대체되면서 폐지되긴 했다.)

그렇다면 음력 새해 해돋이라도 보러 가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때는 다들 음력설을 쇠느라 같이 갈 사람이 없다. 아니 그보다 음력에는 음력설을 쇠는 외가에 가야만 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었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음력설을 친정에서 보내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매년 새해에 뜨는 해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를 상상하며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러면 결혼을 하고 난 지금은? 음력 설에는 처가에 가야지.(…)

어렸을 때를 돌이켜보면 분명 대부분의 집에서 양력설을 쇠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다시 음력설을 쇠는 집들이 많아졌고, 독특한 의지의 소유자이신 아버지 뜻에 따라 우리 집만 양력설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설을 쇠는 데 있어 양력과 음력을 오가는 상황이 생겼을까.

일제의 음력설 박해 정책…. 박정희, 양력설을 사실상 강제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모두가 음력설을 쇠었다. 그러다가 1895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1896년부터 ‘건양’이란 연호를 사용하면서 양력 1월 1일을 설로 지정했다. 하지만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음력설이 여전히 대세였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조선총독부가 양력설을 권장하고 음력설을 ‘구정’이라 부르며 폄하하고 나서자, 오히려 반발이 일어나 양력설을 ‘왜놈 설’이라 부르며 배척하는 움직임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승만 정부에 이르러 양력설을 사흘 연휴(1월 1일 ~ 3일)로 지정하기도 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양력설에 대한 좀 더 강력한 정책을 시행했는데, 음력설을 공휴일에서 제외하고 음력설을 전후해서 직원들에게 휴가를 주는 업체는 행정처분을 받게 하는 식으로 강제하였다. 특히 이는 정부 등 공공기관, 대기업, 교육기관 직원들에게 영향을 크게 주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내 본가도 이 시기에 설을 양력으로 쇠기 시작했다.)

덕분에 양력설 잘 쇠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음력설을 쇠는 사람들이 상당수를 차지했고, 이 때문에 소위 우스개로 ‘이중과세’ 논란이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전두환 정부는 1985년 음력설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단 하루지만 공휴일의 지위를 부여했고, 노태우 정부는 1989년 이름까지 ‘설’로 지정하고 3일의 연휴로 바꾸었다. 이 시기에 대부분 사람들은 음력설로 되돌아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어 1990년에는 양력 설 연휴를 이틀로 줄였으며, 김대중 정부는 1999년에 외환위기에 따른 공휴일 축소 정책으로 이마저도 하루로 줄였다.

이 와중에 본가의 아버지가 양력설을 고수하고 계신 이유는 이렇다. 정확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나라가 조상님 차례 모시는 날을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싫다. 한 번 바꿨으면 되었지 또 뭘 바꾸느냐”는 뉘앙스로 말씀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87년 대통령 직선제가 시작된 이래 늘 군소 후보에게만 투표하신 이유도 전두환, 노태우 정부가 음력설을 부활(?)시키고, 김대중 정부가 양력설을 하루로 줄여서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나는 지금까지 새해 아침 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새해 TV 화면과 신문 1면을 통해서만 봐온 슬픈 인생이다. 국가의 오락가락하는 정책 탓에 피해를 본 대표적인 경우 아닐까. 생각해보면 양력과 음력설에 본가와 외가, 혹은 본가와 처가를 오가며 이중과세를 하고 있어 슬픈 국민이 나 말고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에게 감히 제안한다. 박정희 정부 때처럼 설에 대한 강력한 정책 드라이브를 걸어주길. 양력이나 음력으로 정확하게 하나를 정해주고, 설이 아닌 쪽은 공휴일에서 제외하고, 설 아닌 날 차례 지내면 벌금형이라도 처해 달라고. 그래서 평생 새해 해돋이를 못 보고 살아온 내 인생에 조금이나마 보상을 해 주었으면 한다.

(슬로우뉴스라서 덧붙일 수밖에 없는데, 마지막 문단을 너무 진지하게 읽으면 곤란.)

이런 음식을 두 번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야겠다. (…)

참고자료
[한국사바로보기] 36. 음력설과 양력설의 충돌 (경향신문, 2005-01-26)
대한민국의 공휴일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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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Fast is good, slow is better”, 슬로우뉴스에도 함께 게재하였습니다 *

뗏목지기

만화를 좋아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직장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