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타임캡슐은 제가 여기 저기에 올렸던 만화 관련 글을 모으는 곳. 예전에 썼던 글들이라 지금에 와서는 유효하지 않은 정보들도 있고, 손발이 오글거리는 내용들도 많음. 하지만 백업의 의미로 거의 수정 없이 (의도적으로 맞춤법을 틀리게 작성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맞춤법만 수정) 올림.
[타임캡슐] 『굿모닝! 티처』 만화, 현실에 발 디디려 노력하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1990년은 전교조가 출범한 다음 해였다. 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중학교에 다녔던 관계로 고등학생 형들이 우루루 몰려다니고 선생님들이 쫓아다니고 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별로 신경을 쓰지는 못했었다. 신경 쓰이는 것은 언제 나타나서 돌려차기를 먹일지 알 수 없었던 공수부대 출신의 미술 선생 뿐이었다.
고3때였던가 학기 초에 대대적인 두발단속이 있었는데 그게 어떤 식이었냐 하면 한창 수업중인 교실에 학생과장을 비롯한 몇몇(이런 자리엔 항상 체육이나 교련 선생이 낀다) 선생들이 벌컥 들이닥쳐서는 너, 너, 너 나와! 해서는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어버리는 식이었다.
열을 받을 만큼 받은 학생회 임원들과 대의원들은 다음 학생회 회의를 발칵 뒤집기로 하고는 나름대로는 치밀한 전술을 짰다. 한 명씩 손을 들고 발언을 하되 ‘이상입니다’로 마치면 다음 사람이 손을 들고 학생회장은 바로 지명을 하여 계속 강압적 두발단속에 대한 항의발언을 하는 식이었다.
우리는 회의의 결론을 선생들이 끼어들 틈도 없이 두발단속에 관한 간담회 제의로 내버리고 말았고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하던 선생들의 모습은 아직도 내 머리 속에는 인생에서의 작은 승리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 굿모닝! 티처'(서영웅 작, 대원 간, 1999.08)는 우리 만화계에서는 드물게 고등학생들의 일상을 현실적으로 담아낸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학원만화는 학교를 배경으로 한 무협물이거나 스포츠물, 연애물(심지어는 판타지까지)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원만화는 없는 듯 하다. 게다가 그 리얼리즘이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인 ‘정경희’라는 교사에 의해서 더욱더 부각된다는 점이 만화로서의 이 작품의 우수한 점이 아닐까 싶다.
다만 인물의 대사는 너무 길고 설명적이며 캐릭터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사색적이라는 것은 좀 무리해 보였다. 아마 이 작가가 고교시절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대학시절에 작품을 시작했고 할 말이 얼마나 많았으면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 게다가 이 작품의 결말이 그저 원하는 대학을 가고, 잠깐의 실패는 재수로 극복한다는 식으로 다소 상투적으로 맺어진 점은 솔직히 좀 짜증스럽긴 했다.
그건 작가의 사회의식의 한계일 수도 있고, 명랑만화체(솔직히 극화체라 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가 가지는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하여간 소위 여러 분야에서 (영화에서, 소설에서, 등등에서) 사회적 의식을 가졌다는 작가들이 결국은 초점을 개인이라든가 지엽적인 부분에 맞추는 점은 상당히 웃기는 일이다. 나쁘게 말하면 사회의식이라는 것을 그럴싸한 포장재로 삼는 것이고, 덜하게 말하자면 잘 몰라서 하는 것 일수도 있겠고.
하여간 이 작품은 내용과는 별개로 나의 고등학교 생활을 떠올리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일제시대부터 한국전쟁과 군사독재의 시대를 거치면서 놀랄 만큼 훌륭한 생명력으로 꿋꿋하게도 교육계를 지켜오신 수많은 교육관료들과, 글로벌 경제 시대에 경쟁력을 높이고 개인의 다양성과 교육권을 보장해 주기 위해 과감하게 자기 역할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시장에 자기 몸을 팔아버린 이 나라의 공교육과(사실 똥값도 안 된다), 걸핏하면 교사를 고발하고 심지어는 때리기까지 하는 이 막 나가는 현실에서 교권을 수호하겠다는 투철한 일념 하나로 오늘도 국어사전의 ‘폭력’이라는 단어 옆에 ‘비)사랑의 매’라는 글자를 새기고 있는 스승님들과, 어차피 나이 들어도 자식 덕 못 볼 세상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식이 뭐길래 20년 넘게 수억을 들여가며(그 돈으로 사업을 했더라면!) 다른 자식들이야 어떻든 내 자식만 잘되기를 빌고 또 비는 우리네 어머님들과…
어차피 교육을 뒤집으려면 세상을 뒤집어야 한다는 식의 단순논리를(그러나 만고불변의 진리인!) 굳이 강조할 생각은 없다. 다만 세상은 그다지 낭만적이지도 못하고 낭만적일 수 있으려면 현실을 더 날카롭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는 것이지. 그랬더라면 이 작품은 훨씬 더 시대의 명작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
아, 그리고 들었던 생각 또 하나. 개인적으로는 고등학교 때가 좋았네, 군대시절이 어땠네 하는 얘길 무진장 싫어하지만,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서 하고 싶은 일이 딱 하나 있긴 하다. 학생회 회의 얘기 하면서 우리보고 공산당이네 빨갱이네 하던 선생이 있었는데 우리교실에선 찍소리도 못하면서 다른 반에 가서 꼭 내 얘길 그딴 식으로 하던 그 인간한테 한 마디 해 주는 거.
Written by 뗏목지기 (2001.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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