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 코리아 2016년 03월호 DADDY COOL 코너에 실은 글. 원문에는 실명, 블로그엔 OO.
드디어 초등학생이 된 OO 군. 집에서 학교까지 약 230m를 오가야 한다. 걸어 다니기에 적당한 거리다. 그런데 적응 기간이 지나면 이 길을 아이 혼자 다닐 것이라 생각하니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질까. 과연 이 길을 잘 오갈 수 있을까? 수업은 얌전히 잘 들으려나? 화장실은 문제없겠지? 친구들과는 친하게 잘 지낼까? 쿨하지 못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봄, 그리고 초등학교
국방부, 아니 교육부의 시계는 쉬지 않고 돌아 OO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었다. 겨울의 끝은 졸업, 봄의 시작은 개학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우리나라처럼 3월이 학기의 시작인 나라는 아르헨티나, 호주 등으로 적은 편이다. 독일, 러시아, 미국, 영국, 중국, 프랑스 등 상당히 많은 나라에서 9월에 새 학기를 시작한다. 싱가포르의 경우는 1월, 필리핀과 인도는 6월이다. 일본 영화나 문학에서 졸업이 벚꽃이 지는 이미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일본이 3월 졸업 4월 개학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1961년부터 3월에 학기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난방비를 아끼기 위해서 그렇게 정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분명하지는 않다. 생각해보면 연말연시와 명절의 부산함이 가시지 않은 이런 시기에 졸업, 입학 같은 이벤트까지 더해지는 건 너무 무리인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랫동안 도입에 관한 논란이 있었던 9월 학기제에 슬그머니 마음이 가는 이유다. OO이가 3월에 입학하게 되어서 이러는 건 아니고… 안 믿겠지만.
내가 입학하는 것도 아닌데
문득 출사표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출사표’는 신하가 전쟁에 나가기 전 임금에게 제 뜻을 적어 올리는 글이다. 삼국지로 잘 알려진 제갈공명이 위나라를 치기 위해 유비의 아들이자 촉한의 황제인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가 특히 유명하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 나가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만큼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요즘도 정치인이 선거에 출마하거나 운동선수가 외국에 진출할 때 ‘출사표를 낸다’고 하듯이, 사람에게는 때때로 크게 마음을 먹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나는 결심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억지로 마음먹지 말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최고라는 인생관이다. 해가 바뀌어도 한 해를 돌아보며 새해를 계획하진 않는다. 어차피 달력은 천체의 움직임에 맞춰 사람이 만든 것이다. 시간 자체는 무한하고 해가 바뀌는 것은 무한한 시간 위의 한 점이 지나가는 것뿐이다. 그러니 뭔가 결심할 땐 연말연시가 아니라 언제든 필요할 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만 하고 평소 결심 따위 잘 하지 않는 나인데, OO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이 순간 내가 출사표를 내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아빠와 아이의 시간
이 미묘한 긴장감의 이유를 생각해 본다. 다른 아빠들처럼 나도 아이와의 로망이 있다. 하지만 많은 아빠들처럼 캐치볼이나 축구는 아니다. 아이와 함께 놀이공원을 돌아다니거나 하는 건 좋지만, 기본적으로 몸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소셜 미디어에서 ‘일정 금액이 든 체크카드와 컴퓨터/인터넷으로 음식과 생필품을 주문할 수 있는 창문 없는 독방에서 외출하지 않고 한 달을 버틸 수 있는가’라는 내용으로 논란이 벌어진 걸 봤는데, 당연히 버티지 이게 왜 논란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다. 이런 아빠를 둔 덕에 OO이는 야구를 평소 자기 아빠와 캐치볼 하는 친구에게 배웠고, 축구는 동네 유소년 축구 클럽에서 했다.
앞서 말했듯 로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캐치볼이나 축구가 아닐 뿐이다. OO이와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캐릭터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도 하고 있고, 나중에는 노트북을 나란히 놓고 같은 저장소(repository)를 공유하며 프로그램 개발을 해 보거나, 함께 회로 기판에 발광 다이오드를 꽂고 납땜을 해보고 싶다. 이 정도는 다들 생각하지 않나? (아니면 말고…) 물론 자식의 취향이 늘 부모를 닮지는 않으니 저 싫다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초등학생이 된 OO이는 이전보다 조금은 더 바빠질 것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이와 함께 무언가를 할 시간이 더 적어지겠지.
남자도 핑크
한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OO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서 쓸 가방을 인터넷에서 사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아이와 둘이 여러 매장을 직접 둘러봤다. 아이는 매번 가방 안팎을 꼼꼼히 살핀 후 직접 매고 거울 앞에 서서 짐짓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러고도 결론은 무조건 파란색이다. OO아 다른 색은 어때? 싫어, 파란색. 확고하다. 그리고 강아지 장식이 있어야 한단다. 더불어 가방 안쪽에 물병을 넣을 수 있는 은색 보냉 주머니가 있는 게 좋단다. 결국, 파란색에 강아지 장식이 달려 있고 안쪽에 보냉주머니가 있는 가방으로 결정했다. 아, 이 녀석은 누굴 닮아 이렇게 꼼꼼한 걸까. 나는 아닌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OO이는 한때 핑크와 공주를 좋아했었다.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개봉한 2014년 초였다. 그즈음에는 이불도 가방도 그릇도 디즈니 프린세스가 그려져 있는 핑크핑크한 것을 골랐다. 나와 아내는 아이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었다. 아이에게 성별에 따른 일반적인 고정 관념을 심어주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사 줬었다. 그런데 지금은 OO이가 굳이 파란색을 찾는 것을 보면 유치원이나 또래 집단을 통해 남녀에 따른 색깔, 놀이, 캐릭터, 디자인 등에 관한 관념을 받아들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이들은 학교를 통해 사회성도 키우지만, 자칫 고정관념이 강해지기도 한다. 그 결과 나와 내가 속한 소집단이 아닌 것에 대해 배척하는 성향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니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남자는 핑크. 아니, 남자‘도’ 핑크.
믿음이 가장 중요해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도 3월이면 반이 바뀌고 새 학기를 시작하지만,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맞는 1학년 1학기는 조금은 다른 느낌이 든다. 아빠인 나도 걱정이 있지만 OO이 자신도 걱정이 많다. 뭐가 제일 걱정인가 했더니 40분‘이나’ 앉아 있어야 하고 10분 ‘밖에’ 안 쉬어서 싫단다. 자기한테 10분은 0분과 마찬가지라나. 게다가 어디서 들었는지 학교는 유치원하고 달리 놀잇감도 없고 수업시간에 움직이지도 못하니 학교 가는 게 하나도 좋지 않다며 한숨이다.
사실 나도 학교가 아주 즐거운 곳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건 거의 백 퍼센트에 가까운 뻥이니까. 하지만 OO이가 무척 좋아해서 요즘도 가끔 다시 보는 [쿵푸 팬더]의 우그웨이 큰사부의 말을 대신 전할 수는 있겠다. “좋고 나쁜 것이란 없어.(There is no good or bad.)”, “믿음이 가장 중요해.(You just need to believe.)” 그러니 OO이가 자신을 믿고 또 학교라는 공간에서 때때로 멋진 일을 경험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해 도와주어야겠다.
뗏목지기
일, 가족, 사회, 만화의 조화를 추구하는 잡다한 인생. 기본은 남자 사람. 아이폰6와 맥북에어를 아끼는 시스템 엔지니어, 슬로우뉴스(slownews.kr) 편집위원. OO 아빠. 뗏목지기라는 닉네임 뒤에서 살고자 했으나 페이스북에 의해 실밍아웃당한 뒤 자포자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