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든지 일을 미루면 힘들어진다는 걸 느낍니다. 『이끼』 단행본을 봤을 때 바로 리뷰를 썼어야 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까 자꾸 비교하면서 글을 쓰게 되어서 더 힘드네요. 이 글은 『이끼』 만화 단행본에 대한 리뷰입니다.(영화가 아니에요. ㅎㅎ) 노력은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원작 및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 [『이끼』개봉특집] 윤태호 작가의 과거와 현재 『야후』 vs. 『이끼』보러가기
유해국은 수십 년간 의절하다시피 하고 지냈던 아버지(목형)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살던 마을로 향합니다. 그 전에 해국도 박민욱 검사와의 긴 싸움에서 가족도, 직장도 잃은 상태였지요. 해국은 장례를 치른 후 마을에 정착하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의 싸늘한 눈초리를 느끼게 됩니다. 천용덕 이장과 그의 수족과 같은 김덕천, 전석만, 하성규, 그리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마을의 유일한 여자 영지. 그들과 아버지 사이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해국은 의혹을 가지고 아버지가 죽은 이유를 파헤치려 합니다. 그 와중에 전석만과 하성규의 죽음에 얽히게 되고, 역시 해국과의 싸움에서 ‘좌천’이라는 짐을 안은 민욱과 함께 의혹의 중심에 다가갑니다.
첫 번째 키워드, 아버지
『이끼』에서 아버지는 ‘부성애’와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존재입니다. 아내와 자식을 20년 이상 버려두었고, 아내가 죽었을 때도 마을에만 있었던 사람이죠. 신이 되고자 했던(천용덕 이장의 표현이지 실제로 목형의 의도가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는 두렵거나 원망스러운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유목형 외에 또다른 아버지의 존재가 천용덕 이장입니다. 작품 전반에서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결국 천용덕 이장의 모습은 철저하게 가부장적이면서 이기적이고 잔인한 한 아버지의 모습이죠. 윤태호의 작품에서 아버지는 대체로 이렇습니다. 전작인 『야후』의 두 주인공 김현과 신무학의 아버지를 보면 알 수 있죠. 무지막지한 매질 뒤에 잠든 (척 하는) 아들에게 약을 발라 주는 아버지에게 더 미움을 느끼는 김현, 돈으로 군대를 면제시키려는 졸부 아버지를 멸시하는 신무학. 아버지와 아들은 이렇듯 서로 화합할 수 없는 물과 기름 같은 존재로 그려집니다. (『야후』 관련 윤태호 작가 인터뷰 바로가기)
전통적인 의미에서 ‘부성애’는 찾아볼 수 없는 듯한, 뒤틀린 두 인물의 모습은 폐쇄적인 마을이라는 공간적 특징 속에서 더더욱 극대화됩니다.
두 번째 키워드, 폐쇄성
『이끼』의 대부분의 사건은 마을 안에서 일어납니다. 고립된 마을이라고 하지만, 휴대폰이 안 터지는 것도 아니고, 차가 다닐 수 없는 곳도 아니죠. 전석만은 읍내에 있는 자신의 공구가게로 출퇴근을 하고, 해국은 PC방도 갈 정도니까요. 하지만 공동으로 이용하는 창고, 마을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장의 집, 외부인인 해국에 대해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내는 마을 사람들 등, 결국 마을의 폐쇄성은 공간적인 특성이라기보다 인물들로부터 만들어진 것입니다.
바로 이런 폐쇄성이 작품 전체에서 긴장감을 고도로 극대화시킬 수 있는 장치가 됩니다. 비 오는 밤 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해국과 덕천, 공동창고에서 ‘해국의 눈이 본 바로 그 모습’ 등에서 섬찟하고 짜릿한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런 폐쇄된 공간에서 해국은 모든 것에 대한 의혹과 집착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지요.
세 번째 키워드, 집착
해국은 사소한 시비 끝에 가해자로 몰리게 되고, 박민욱 검사는 합의를 종용합니다. 해국이 마을로 오기 전의 이야기죠. 해국은 자신의 정당함을 증명하기 위해 끝까지 싸웁니다. 8개월을 상처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움직였고, 경찰 몇 명과 담당검사(박민욱)은 업무상 배임으로 지방으로 전출되죠. 그러나 결과적으로 해국도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 자신을 응원한다고 믿었던 아내, 그리고 직장동료들에게서 버림받게 되니까요.
사실 아버지의 죽음을 파헤치는 해국의 모습은 집착에 가깝게 그려집니다. 해국 스스로도 과거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갈등을 하죠. 자신의 모습이 옳은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이장이라는 거대한 권력에 맞서 목숨을 위협받으면서 의혹을 파헤치려 하는 해국의 집착(혹은 집요함)과 갈등은 『이끼』를 감상하는 하나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네 번째 키워드, 권력
긍정적인 권력이고자 했으나 인간적인 미숙함과 환경의 압박으로 좌절하는 유목형과, 그를 제압하고 잔인하고 폭압적인 권력자가 된 천용덕. 위에서 말한 두 아버지는 각각 다른 형태의 권력을 표현합니다. 개인의 치부를 일삼는 기도원 원장의 모습은 혹세무민하는 권력을, 해국에게 부당함을 강요하다가 해국의 조력자가 되는 박민욱은 긍정적으로 변화하는 권력을 은유합니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위에 보이는 광화문 주변의 위성사진으로 마무리한 것도 이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지요.
이런 식으로, 『이끼』의 모든 등장인물과 줄거리는 철저하게 정치적인 텍스트로 읽힐 수 있습니다. (작품 후기에서 보듯, 작가 스스로도 굳이 정치적인 해석을 경계하지는 않습니다.) 나아가서 김덕천, 전석만, 하성규의 모습은 권력에 빌붙은 자들을, 천용덕의 경찰관 아들은 정권의 이익에 복무하는 공권력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구요. 그러면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영지는 뭘까요? 권력에 유린당한 언론을 상징한다고 하면 과도한 해석일까요?
저는 결국 앞 부분에서 말한 ‘아버지’라는 키워드를 마지막에 ‘권력’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다시 강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끼』의 줄거리가 권력에 대한 상징이라고 본다면, 위에서 말한 ‘폐쇄성’, ‘집착’ 또한 다른 형태로 해석될 수 있겠죠. ‘억압’과 ‘저항’으로 말입니다.
하나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작품이 짜임새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구요. 『이끼』를 정치적인 의미에서 바라보지 않더라도, 위에서 말씀 드린 네 개의 텍스트는 작품 전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작품보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분이나, 작품을 다시 보실 분들에게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