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는 동네에 소문난 호랑이 할매였다.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놀면 불호령을 내리기 일쑤고 거기다 ‘집주인 할머니’이기도 했으니 그 위세가 오죽했을까. 사실 할매의 친정은 꽤 부유한 편이어서 시집 오기 전까지 집안일을 거의 안 해봤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어 한국전쟁에 남편을 잃고 어린 두 남매를 키우느라 나름 고생은 하셨을 터이다. 그래서인지 할매는 돈에 대한 집착과 절약에 대한 강박이 강한 편이었다.
내가 할매에게 결정적으로 화가 났던 때는 용돈을 모아 소중하게 사서 조립한 프라모델을 보고 크게 화를 내며 내다버렸을 때였다. 아마 할매에겐 내가 돈을 허투루 쓰는 것처럼 보였을 게다. 엄마 등에 업혀 있었던 시간보다 할매 등에 업혀 있었던 시간이 더 많았고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내 방이 생기기 전까지 주욱 할매와 같은 방을 썼지만, 그닥 따뜻함과 포근함을 느껴본 적은 없었던 건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아픈 배를 쓸어주시고 더운 여름 부채질에 내가 아플때 업고 병원으로 내달린 것도 할매였지만 철없던 나에겐 버려진 프라모델의 기억이 더 컸다.
최근 몇 년간 할매는 치매를 앓았다. 몇 달 전까지는 거동에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점점 주변 사람 모두를 알아보지 못하고 옛날 얘기를 하거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울기도 하셨지만 먹은 밥을 또 달라고 떼를 쓰거나 대소변을 못가리는 정도는 아니었다. 일년에 두세번 봤던 할매는 점점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내 아이를 보며 내 이름을 부를 때는 할매가 이제 나의 어린시절을 살고 계시는구나 싶었다.
그러다 화장실에서 넘어져 엉치뼈 복합골절을 당하면서 할매는 요양병원으로 옮겨졌다. 엄마는 병원 직원들에게도 소문날만큼 매일 병원을 찾는 효부였지만 과거로 가는 할매의 시간을 멈추지는 못했다. 병원에서 본 할매는 이제 아주 쬐끄만해졌고 웅크린 모습은 마치 아기 같았다. 가끔 본인의 어린시절로 돌아간 듯 노래도 부르시곤 했다.
솔직히 나는 언젠가는 할매에게 “와 그랬노?” 하며 어릴 때 왜 내 프라모델을 버렸는지 묻게 될 날이 올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날은 이제 오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나는 할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할매의 어린 시절을 나는 모른다. 남편 없이 남매를 키우던 그 세월도 모른다. 장성한 아들 딸을 결혼시키고 며느리와 사위를 맞고, 손주들과 외손주들이 태어났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그 많은 것이 궁금해졌지만 다시는 할매에게 그 얘기를 들은 순 없을 것이다. 너무 늦어버렸기 때문이다.
2017년 1월 17일 아침, 그런 내 할매가 세상을 떠났다. 할매, 내가 미안타. 그래도 너무 머라하지 말고 함 바도. 거 가서는 다 잊고 편한하이 있거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