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 코리아 2016년 05월호 DADDY COOL 코너에 실은 글. 원문에는 실명, 블로그엔 OO.
어린이날이 한 달도 넘게 남았는데 OO이는 벌써 선물 타령이다. 엄마 아빠에게 뭘 맡겨 놓은 것도 아니면서 어린이날에 선물을 받는 것이 녀석에게는 아주 당연한 일이 되었다. 잊을만하면 졸졸 따라다니며 자기가 갖고 싶은 것들을 줄줄 읊어대는 OO이를 보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 그냥 어린이날 어버이날 퉁치면 안 되겠니?”
선물도 스케줄이 있지 말입니다
나는 어릴 적에 소위 말하는 대목을 누려본 적이 별로 없었다. 아이들에게 대목이라면 설날, 어린이날, 추석, 크리스마스 정도일 텐데, 그럴 때 딱히 많은 용돈이나 큰 선물을 받았던 기억은 없다. 그런 날 외식이나 나들이를 하기도 했지만 때때로 주말에 해오던 외식, 나들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명절 세뱃돈도 평상시에 받던 용돈 정도의 적당한 금액이었다. 특별한 날이라고 특별한 선물을 받진 않았지만, 평소 내가 원하는 것(과학상자나 만능키트 같은)을 얘기하면 적당한 때에 사 주셨던 거로 기억한다. OO이의 할아버지 할머니이기도 한 내 부모님은, 이벤트보다는 일상을 챙기시는 분들이었다.
그때는 친구들의 선물 획득, 세뱃돈벌이 무용담을 들으며 속 쓰려 하기도 했지만, 부모가 되고 나니 일상을 그 자체로 잘 챙기기가 더 어렵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도 그런 부모가 되고 싶었지만, 현재 스코어 조금은 실패한 상태인 듯하다. 나와 아내는 어느새 이 마트 저 마트를 떠돌면서 아드님이 원하는 물건이 들어왔는지 확인하고 줄을 서고 있었다. 찾는 제품이 파워레인저에서 요괴 워치로, 요괴 워치에서 터닝메카드로 바뀐 것뿐, 하는 일은 매번 같다. OO이는 이런 날 으레 선물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머릿속에 한 해 동안의 선물 스케줄(!)을 담아두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린이날과 아이들의 욕망
사실 대부분의 욕망은 사회적인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 일컬어지는 식욕, 성욕, 수면욕 등을 빼면 대부분의 욕구는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아이들은 친구들과의 관계와 여러 매체를 통해서 장난감, 만화, 애니메이션 등을 소유하고 누리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된다. “쟤는 있는데 나는 왜 없어!”하는 감정은 사실 아이나 어른이나 똑같다. 신해철의 곡 [나에게 쓰는 편지]에 나오는 것처럼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 액수, 돈, 큰 집, 빠른 차, 명성, 사회적 지위’에 관한 어른들의 마음도 사회화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들이다. 다만 아이들은 그런 욕구를 부모에게 의존해서 풀어야 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머리로는 알아도, 선물 고르느라 머리를 굴리는 OO이를 보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번 어린이날 선물도 자꾸 바뀐다. 처음엔 터닝메카드 그리핑크스가 좋겠단다. 뭔가 찾아보니 드디어 터닝메카드도 합체 모델이 나온 거였다. 터닝메카드는 또봇이나 파워레인저와는 달리 적어도 합체는 안 시킨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뒤통수를 맞았다. 그런데 아내에게 들어보니 블럭방에 갔다 온 다음에는 거기에 전시된 커다란 레고 캐슬 모델을 받고 싶다는 얘기도 했다고 한다. 보아하니 지금 뭘 받으면 제일 좋을지 엄청나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모양새다. 오늘 아침엔 “엄마, 어린이날 선물로 그냥(음?) 피아노 사 주세요.” 이랬단다. 이 녀석, 엄마 아빠가 버튼만 누르면 뭐가 나오는 자판기인 줄 아는지.
나도 어버이날 받고 싶은 것이 있단다
이참에 OO이와 무릎을 맞대고 진지한 대화를 나눠봐야 하려나. “엄마 아빠가 네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여주고 재워주고 교육하고, 장난감 사주고 놀아주고, 책 사주고 읽어주고, 여행 다니고 체험시켜주고 이것저것 하느라 얼마나 노고가 많았는데 때마다 선물까지 요구하다니 너무 배은망덕하지 않니. 어린이날과 3일밖에 차이 나지 않는 어버이날에 엄마 아빠가 받은 건 어린이집에서 만든 종이 카네이션이었구나. 그러니 앞으로 그 가치의 차이를 어떻게 메워나갈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한 다음 그 계획을 각서로 써 보면 어떻겠니?.” 이렇게 말하면 무슨 사채업자가 채무 상환 계획 받아내려는 것 같아서 안 되려나.
하지만 나도 어버이날에 받고 싶은 것이 있다. OO이가 더 크면 현금이 가장 받고 싶을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떠오른 건 쿠폰 선물이다. 안마 10분 이용권, 노래와 춤 1곡 이용권, 발 씻겨주기 이용권 이런 걸 받아서 한 번씩 써보면 좋겠다. 뭔가 노동력 착취 쿠폰 같은 느낌이긴 한데, 주변에서 들으니 어쩐지 좋아 보였다. 이 기회에 OO이를 꼬드겨 어린이날 선물과 빅딜을 추진해 봐야겠다. 아마 아내도 아주 좋아하며 좋은 생각이라고 머리를 쓰담 쓰담 해 줄 것 같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당연히 부모와 아이는 일 대 일로 주고받는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안다. OO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장인어른께 감명 깊게 들은 말이 있는데, 자식은 어릴 때 엄마 아빠 얼굴 보면서 방긋방긋 웃어준 것으로도 평생 효도를 다 한 것이니 자식 키우면서 특별히 뭘 더 기대하거나 요구하지 말라는 얘기셨다. 그래서 적어도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같은 말은 하지 않는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어 왔다. 그러니까 앞서 말한 각서 얘기는 진심이 약 0.0001퍼센트 정도 섞여 있긴 해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해두자.
이벤트도 좋지만 일상을 알차게
어버이날 얘기를 하고 나니, OO이와 OO이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관계도 걱정이다. 가끔 전화나 영상 통화를 하긴 하지만, 멀리 떨어져 살다 보니 한 해에 기껏 서너 번 정도밖에 못 뵙는다. 그러다 보니 저도 어색한지 남자애라 그런지 할아버지 할머니와 데면데면하게 굴 때가 많다. 그랬던 녀석이 작년엔가 설날에 터닝메카드를 받은 뒤부터 달라졌다. 요즘은 스피커폰에서 “우리 OO이 뭐 갖고 싶은 거 없니?” 하는 소리가 들리면 눈이 동그래져서 달려와 어찌나 예쁘게 통화를 하는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야 할까 다른 방향으로 교육해야 할까 참 고민이다.
아이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부모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데, 사실 나부터가 부모님께 살갑게 구는 스타일이 아니다 보니 OO이에게 뭐라고 하기도 힘들다. 멀리 있답시고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는데다 자주 전화를 드리지도 않고 가족사진이나 동영상을 챙겨 보내드리지도 못했었다. 상투적인 결론이긴 해도 앞으로는 평소에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 5월에는 이런저런 이벤트가 많긴 해도 역시나 가장 중요한 건 일상을 알차게 채워나가는 것일 테니까. 아, 그래도 어버이날이니만큼 정성스러운 마음이 담긴 입금도 빼 먹지는 말아야지.
뗏목지기
일, 가족, 사회, 만화의 조화를 추구하는 잡다한 인생. 기본은 남자 사람. 아이폰6와 맥북에어를 아끼는 시스템 엔지니어, 슬로우뉴스(slownews.kr) 편집위원. OO 아빠. 뗏목지기라는 닉네임 뒤에서 살고자 했으나 페이스북에 의해 실밍아웃당한 뒤 자포자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