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 코리아 2016년 02월호 DADDY COOL 코너에 실은 글. 원문에는 나를 포함한 가족의 실명이 있지만 블로그에는 가리고 올린다.
서울 모처에 살고 곧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OO 군은 한두 해 전까지 ‘싫어’, ‘몰라’를 입에 달고 살았다. 입 안에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인식해 ‘싫어’, ‘몰라’를 랜덤으로 재생하는 스피커가 있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그럴 땐 아빠의 단전에 모인 열기가 머리 끝으로 올라간다. 즉시 운기조식을 하지 않으면 고성과 울음이 난무하면서 온 집안이 주화입마에 빠지게 된다.
한때는 쓸만했던 시러마녀
OO이가 싫어 로봇으로 상시 변신했던 그때, 그나마 효과를 봤던 방법은 “시러마녀가 온다”였다. 시러마녀는 [‘싫어’, ‘몰라’라고 하지말고 왜 그런지 말해봐!](이찬규, 두산동아)라는 책에 나오는데, 아이들에게 마법을 걸어 싫어쟁이, 몰라쟁이로 만들어 잡아 가둔다. 단순히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게 아니라 부모도 아이도 어떻게 감정을 표현하고 대화를 나누어야 하는지 잘 설명되어 있는 좋은 책이다. 지금 생각하면 좋은 내용과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아이에겐 무서운 협박(?)으로 인식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긴 하다. 그래도 한동안 잘 먹혔던 것은 사실이다.
초등학생이 되기 직전인 지금은 그때만큼 싫어를 남발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가끔 예측할 수 없는 타이밍과 상황에서 반항을 하곤 한다. 그래서 최근 다시 시러마녀를 호출해 봤는데 예전과는 반응이 다르다. “너 자꾸 그러면 시러마녀가 와서 데려간다?” 말했더니 아이는 “으앙~ 안 돼~ 잡아가지 말라구 해.” 이런다. 하지만 표정은 웃고 있다. 마치 “아버님, 제가 나이가 몇 살인데 그런 얘기를 하십니까. 하지만 산타클로스처럼 시러마녀도 기꺼이 믿는 척하여 안심하게 해 드리겠나이다.” 이런 얼굴이다. OO 군, 7세 겨울. 시러마녀의 유효 기간이 끝났다.
해야 할 일이 싫은 게 아니야
관찰해 본다. OO이는 언제 싫다고 하는가. 주로 뭔가 하자고 할 때다. 아침이니 일어나자, 옷 입자, 유치원 가자, 집에 왔으니 손 씻자, 밥 먹자, 유치원 숙제 하자, 목욕하자, 양치질 하자, 자자. 쓰고 보니 거의 전부다. 대부분 입력 변수와 상관없이 리턴 값이 “싫어”인 프로그램 함수처럼 동작한다. 놀자, 애니메이션 보자 등의 예외가 있긴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소수다. 좀 더 관찰해 본다. OO이가 싫다고 할 때는 주로 뭘 하고 있나. 책을 읽는다, 만화책을 본다, 게임을 한다, 애니메이션을 본다, 레고를 조립한다, 장난감을 가지고 논다, 등등이다.
적어 보니 조금씩 이해가 된다. OO이는 내가 하자는 무언가가 싫은 게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기가 싫은게다. 사실 나도 그렇다. 탐정 갈릴레오(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 소설 시리즈 주인공)가 한참 추리를 하고 있는데 어떻게 중간에 책을 덮나. [요괴소년 호야] 만화가 발행된 지 십 수 년만에 나온 TV 애니메이션은 흐름이 끊기지 않게 연이어 봐야 한다. 시작한 퀘스트를 끝내지 않고 게임에서 로그아웃하면 재접속할 때까지 계속 생각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아내가 안 사줘서 그렇지(…) 나도 레고 좋아한다. 한참 레고를 조립하는데 그만두라고 하면 나라도 싫을 것이다. 아이든 어른이든 좋아하는 것을 중간에 끊기는 쉽지 않다.
이해한다, 그래도 다는 안 된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이 접하는 여러 문물들은 어른인 내가 봐도 재미있다. OO이가 좋아하는 [마법 천자문] 시리즈는 책과 애니메이션 모두 개성 있는 인물과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최강! 탑플레이트]도 즐겨 보는 애니메이션이다. 뭔 놈의 팽이가 싸우는데 불꽃이 튀고 용암이 흐르고 절벽이 무너지고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함께 보니 OO이가 빠져들 만큼 재미있게 만들었더라. 특히 요즘 가장 푹 빠져 있는 터닝메카드는 또 어떤가. 나조차도 자동차가 카드와 만나서 로봇으로 휙 변신하는 모습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OO이와 터닝메카드 배틀을 벌이고 있을 때 아내가 밥 먹자고 하면 내가 먼저 ‘싫어, 한 판만 더.’를 외치고 싶더라. (여보, 미안.)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이해가 된다고 해서 모두 용납할 수는 없다는 거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한정된 시간 안에 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으니까. 고민 끝에 되도록 많은 것을 아이가 정하게 해 보았다. 물론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하다. “양치질 언제 할까? 지금 읽는 책 다 보고 할래? 싫어? 그럼 언제 할지 정해봐. 한 권 더 읽고? 그래.” 타협할 수 없이 바로 해야 하는 일은 밑밥을 잘 깔아줘야 한다. 집에 오는 길에 들어가면 손부터 씻자고 얘기를 나누거나, 식사 준비에서 간단한 일들에 동참을 시키는 식이다. 말하자면 해야 할 일을 예측하게 해 주는 내 나름의 기선제압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대화는 접점을 찾아서
물론 OO이와의 대화가 언제나 예측했던 시나리오대로 무난하게 끝나는 것은 아니어서 가끔 내가 울컥하는 경우도 생긴다. 주가가 50% 하락한 다음 원금을 회복하려면 상승율이 50%가 아닌 100%여야 하는 것처럼, 커뮤니케이션에서도 마이너스 포인트를 쌓으면 회복하기가 쉽지 않다. OO이가 언젠가 TV를 물끄러미 보면서 이랬던 적이 있다. “아빠~ 내가 옛날에 볼펜으로 TV 긁어서 아빠가 화냈었지~ 미안해~” 말도 잘 못할 때 있었던 일이었는데. 그때 그러지 말것을, , 무척 후회가 되었다. 앞으로는 “아빠, 우리 전에 OOO했을 때 되게 좋았지. 또 하자.” 이런 말을 더 많이 들어야겠다 싶었다.
며칠 전에는 OO이가 엄청난 걸 발견했다는 표정으로 다가와서는 귓속말을 했다. “아빠, 재밌는 거 알려줄까? 천재가 뭔지 알아?” 서…설마? “천하에 재수 없는 놈! 깔깔깔” 이럴 수가. 이번엔 노래를 부른다. “루돌프 사슴 코는 개코! 매우 반짝이는 코딱지! 만일 내가 봤다면 변태! 불붙는다 했겠지렁이! 다른 모든 사슴들창코! 놀려대며 웃었네네치킨!” 이것은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릴까 말까를 외치던 심형래 옹의 계승이 아닌가. 어릴 때 듣고 말하던 그 말장난을 아이의 입에서 듣는 것은 꽤 경이로운 일이었다. 아빠와 아이가 서로 다른 시절에 어린 날을 보내더라도 접점은 늘 있으니 그걸 계속 찾다 보면 서로 싫다는 말은 덜 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음, 그래도 저 노래는 집에서만 부르는 걸로 합의봐야겠지만.
뗏목지기
일, 가족, 사회, 만화의 조화를 추구하는 잡다한 인생. 기본은 남자 사람. 아이폰6와 맥북에어를 아끼는 시스템 엔지니어, 슬로우뉴스(slownews.kr) 편집위원. OO 아빠, OO 남편. 뗏목지기라는 닉네임 뒤에서 살고자 했으나 페이스북에 의해 실밍아웃당한 뒤 자포자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