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후 준비에 관하여
10년 가까이 가족모임을 가지는 고등학교 동창 그룹이 하나 있다. 나 포함 여섯 명이다. 여섯 가족이 다 모이는 경우도 있고 시간 되는 대로 몇 가족씩 모이는 경우도 있다. 이번 주말엔 세 가족이 모였다.
주된 대화의 소재는 ‘노후 준비’였다. (…) 요즘 캠핑에 재미를 붙인 한 명은 캠핑장을 운영하겠다며 지역과 땅 시세 같은 걸 알아보곤 한단다. 여행을 좋아하는 하나는 관광 통역사를 하면 어떨까 싶어 방통대 편입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2. 직업을 설명한다는 것-1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시스템 엔지니어’라는 것은 보통 남에게 설명하기가 꽤 힘들다. 10년 이상 이 일을 해오고 있으니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설명하는 거 자체가 일이다. 그래서 보통은 ‘IT쪽에서 일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게 된다. 부모님도 아들 직업을 남에게 설명하기가 참 힘들 거다.
한국 사회에서 직업을 쉽게 설명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다. 설명하기 쉬운 직업(교사, 의사, 변호사, 기자 등등)을 가지거나, 설명하기 쉬운 회사(삼성이나 엘지나 현대나)에 다니거나. 후자의 경우 직업이 아니라 직장을 설명하는 것 뿐이지만, 대체로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게 사실이다.
만약 내가 대기업 혹은 대기업 계열에서 시스템 엔지니어 일을 했다면 설명이 아주 쉬웠을 것이다. 시스템 엔지니어가 뭐하는 사람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
3. 직업을 설명한다는 것-2
맨처음 노후 준비 얘기로 돌아가서, 캠핑장 운영이나 관광 통역사는 설명하기가 쉽다. 대화에 끼어들기도 쉽다. 그런데 내 경우는 지금 직업도 설명하기 어려운데 나중에 하고 싶은 일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내가 나중에 하고 싶은 일은 ‘슬로우뉴스의 전업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노후 준비’와는 좀 다른 개념이지만) 그것도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시스템 엔지니어로서, 기자로서, 편집위원으로서 등 여러 역할을 그 안에서 하고 싶다. 그런데 이걸 설명하려면 얘기가 엄청 길어진다는 게 함정…
게다가 캠핑장 주인이 되기 위해 땅을 알아본다거나, 관광 통역사가 되기 위해 방통대를 들어간다거나 하는 건 굉장히 구체적이기도 하고 알기가 쉽다. 그런데 나는 글을 열심히 쓰고, 편집을 열심히 하고, 뉴미디어의 트렌드에 대해 공부하고 이런 게 남들에게는 좀 뜬금없이 보이기도 할 거다. (그래서 말을 잘 안 하게 됨…) 아마 아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
4. 문제는 그게 아닌데
사실 문제는 얼마나 설명하기 쉬운 직업을 가지느냐(혹은 설명하기 쉬운 직장에 다니느냐)가 아니다. 아직도 내게 확신이 부족한 게 가장 클 것이고, 그게 주변 사람에게도 보일 것이다. 나는 확실히 이게 문제다. 내가 ‘남에게’ 설명해야 하는 게 앞서고, 부모님이, 아내가, 아이가 ‘남에게’ 내 직업을 설명하게 하는 게 걱정이고 이런 거.
어떻게 보면 이게 종특인데(ㅡ,.ㅡ;), 수십년 쌓아 온 패시브 스킬을 리셋하는 게 쉽지 않다. 결론이 안 나는 이야기지만 한 번씩 다시 들여다 볼 요랑으로 일단 블로그에 끄적여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