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버스 안에서

 

1.

한 20년만에 고교 동창 몇 명과 남자들만의 1박 2일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십 여년간 커플, 가족 모임을 가져오긴 했지만 정작 이렇게 모이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살짝 들떠 있다.

2.

덕분에 무지 오랜만에 고속버스를 타게 되었다. 승차권 예매 앱을 다운받았는데 의외로 디자인도 깔끔하고 사용성도 좋았다. 승차할 때 리더기에 모바일 승차권을 읽히면 승차 처리가 되고, 음성으로 좌석 번호도 재확인해준다. 오, 세상 좋아졌네.

그런데 우등 고속엔 컵 홀더가 없다. 우아하게 스타벅스 아이스 카페 아메리카노를 들고 탔는데 무지 불편해! 처음엔 앞 좌석 등받이 뒤에 망에 넣어봤는데 앞 승객이 등밪이를 뒤로 확 젖히는 바람에 무용지물. 덕분에 이 글 쓰느라 허벅지 사이에 껴뒀는데 막 젖어드는구나. (…)

세상 많이 좋아졌다

3.

대학 입시를 치르고 연말의 어느 날이었다. 오늘 만나는 친구들이 모였었다. 한 친구의 고향 마을에 빈 집이 있다 하여 대충 치우고 아궁이에 불도 지폈다. 뭐했냐고? 술 마셨지. 신 김치와 라면만을 안주 삼아 소주를 퍼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TV에서는 마침 연말 연기대상이 나오고 있었다. 다양한 건배사와 함께 종이컵으로 소주를 완샷하던 우리는, 건배사가 떨어지자 연기대상 수상자를 축하하기 시작했다. “남자 우수상 수상자 누구누구를 위하여!” 이런 식이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 해의 연기대상이 김혜자였다는 것은 지금도 기억이 난다. 예닐곱 명이서 소주 PET 댓병 두 개, 일반 병 7개쯤을 먹었던 듯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취해서 다같이 잠들었는데 한 녀석이 자다가 토할 것 같아서 깼다. 그 와중에도 녀석은 방에는 토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필사의 다이빙으로 문 밖으로 날아가 토를 했다. 덕분에 방은 지저분해지지 않았다. 문 밖에 벗어 놓았던 신들이 테러를 당했지.

술 먹다 중간에 나가서 그 겨울에 농로에 드러누워 소리도 지르고 노래도 부르고 그랬는데, 다시 생각하니 정말 다들 꼴통이었구나… 그 때의 마을 주민들께 늦었지만 사과 드린다. 쿨럭.

차창밖 풍경

4.

아무튼 가족을 뺀 남자들만의 모임이 성사되었을 때 다들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던 것 같다. 단체 채팅방에서 이번엔 라면이랑 김치 누가 가져오냐, 다들 신발은 꼭 신발장에 넣어두자, 연기대상 시즌이 아니니 뭐 보며 건배할까 이러면서 킥킥대고들 있다.

딱히 모여서 뭐할지 정하진 않았는데, 어차피 다들 나이 먹고 수다만 늘어서 심심하진 않을 듯하다. 이제 도착 시간이 한 시간 반쯤 남았다.

뗏목지기

만화를 좋아하고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직장인입니다.